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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 전시실
 
   품   명 : 좌옹 윤치호선생약전(佐翁 尹致昊先生略傳)
   시   대 : 1934
   크   기 : 15.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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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 세 설 명

품   명   좌옹 윤치호선생약전(佐翁 尹致昊先生略傳) 19.11.코 구.15주   기  尹致昊, 창씨명 伊東致昊, 1865∼1945 ◆ 1941년 흥아보국단 준비위원회 위원장.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고문. 1945년 칙선귀족원 의원. 1945년 대화동맹 위원장 타협적 개량주의자의 별절 행로"우리 조선 민족으로서는 어디까지나 일본을 믿고 피아의 구별이 없어질 때까지 힘쓸 필요가 있는 줄로 생각하고……이후부터는 일본 여러 유지 신사와 교제하여서 일선(日鮮) 민족의 행복되는 일이든지 일선 양 민족의 동화에 대한 계획에는 어디까지 참여하여 힘이 미치는 대로 몸을 아끼지 않고 힘써 볼 생각이다"({매일신보}, 1915. 3. 14). 이 말은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체포되었다가 친일 전향을 조건으로 1915년 2월 13일 특사로 출감한 윤치호가 매일신보사 기자와 가진 인터뷰의 한 대목이다. 윤치호는 1881년 17세 때 신사유람단 조사(朝士)였던 어윤중(魚允中)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건너가, 한국 최초의 동경 유학생의 한 사람이 되어 개화사상을 수용하였다. 또 갑신정변 때는 개화당의 일원으로 조국의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을 위해 활동하였다. 그 후 윤치호는 10여 년 간 중국과 미국으로 망명·유학하여 서구 민권사상과 기독교 신앙을 수용했으며, 독립협회운동이 절정기에 달한 1898년경에는 독립협회 회장, 독립신문 주필 그리고 만민공동회의 최고 지도자로서 민권운동과 참정·개혁운동을 정력적으로 지도하였다. 한말에는 계몽운동에 의한 실력양성운동에 진력하여 신민회에도 관여하는 등 근대민족운동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다. 그러나 윤치호는 개화기 시절부터 민족패배주의적 사고방식에 함몰되어 타협적 개량주의를 지향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1915년 이후 일제의 통치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게 하였고, 독립불능론 내지 독립무용론으로 변모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에 따라 그는 끝내 일제의 침략을 대세순응적으로 인정하여 일선융화에 동조하였으며, 1930년대 중반 이후에는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과 전시동원체제 확립에 적극 협력하는 등 '선량한' 신민 윤치호에서 '충량한' 일본 귀족 이토 치카우(伊東致昊)로 입적한 채 일생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