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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승구 선생의 농서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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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7-07-06     조회 : 865  

여승구의農書탐구

여승구          

1. 農者天下之大本

우루과이라운드의 타결로 우리 사회에 회오리바람이 일고 있다. 지적재산권이나 금융ㆍ재정ㆍ유통 등 서비스분야로부터 농업분야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의 문이 열림으로서 기반이 허약한 우리 산업에 큰 충격을 주고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일부 개방의 덕을 보는 분야도 있어서 나라 전체로 볼 때는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오늘의 세계는 나라와 나라사이, 산업과 산업사이가 복잡하게 얽혀져 있어서 이익이 나는 것만 취하고 손해가 나는 것은 거절할 수 있는 단순한 관계가 아니라는데 우리의 고민이 있다하겠다.
개방은 세계의 큰 흐름이며 이런 대세 속에서 어떻게 큰 것을 얻고 손해를 최소화시키느냐가 「우루과이라운드」에 대응하는 우리의 현명한 자세라고 생각한다. 지난 5천년동안 농경민족으로 우리의 고유문화와 문자를 향유하며 백의민족의 단일성을 지켜온 농업과 농촌이 근대화 산업화과정에서 처참하리만큼 소외되고 무력화되어 공업화ㆍ도시화정책의 그늘 속에서 희생되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업에 집중투자 하여 얻은 과실로 값이 싼 외국의 농산물을 수입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탁상이론가들의 단순논리 위에서 쌀은 절대 개방하지 않겠다고 공약하고서도 슬며시 문을 열어 죄송하다며 국민 앞에서 큰절로 사과하고 장관 몇 명을 바꿔치우는 임시방편으로 이글거리는 농촌의 분노가 삭여지고 국운을 되돌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농업과 농촌은 한민족의 원형이며 「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민족의 원형사상이 무너질 때 민족도 망한다는 역사의 법칙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농업과 농촌을 어떻게 지키고 살릴 것인가? 개방화ㆍ국제화라는 세계의 큰 흐름을 거슬러 이에 항의하거나 데모하고 또 여의치 않을 때 자포자기 하여 농촌을 떠나버리면 문제가 해결되리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오늘의 농촌문제는 어느 계층의 소득의 과소문제라든가 국가경제운용의 효율성, 달러 몇 푼을 더 벌어들이려는 경제적인 개념이 아니라 민족의 존망이 걸린 중대사인 것이다. 강대국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오랫동안 나라를 굳건히 지킨 조상들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찾아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고 생각해 소장된 農書를 추려 소개하고자 한다.
농업에 문외한인 필자가 이런 글을 쓰게 된 것은 이 고장 출신으로 古書 수집 중에 農書를 다수 소장하게 된데서 연유한 것이며 이번 시리즈를 圖板 중심으로 書誌的인 해설에 국한 될 수밖에 없음을 밝혀둔다.

 

2. 農事直說

「農事直說」은 세종대왕의 명에 의하여 1429年에 鄭招 및 卞孝文이 편찬한 한국인이 저술한 한국 최초의 農書이다. 물론 三國史記나 三國遺事에 농사에 관한 기록들을 불 수 있고 중국의 魏志ㆍ隋書ㆍ高麗圖經과 日本 正倉院 소장의 新羅民政文書 등 외국의 史書에서도 단편적인 기록들을 통해서 당시의 실상을 엿볼 수 있다.
1349년에 「農桑輯要」를 중국으로부터 가져와 국내에서 복각출판하였다는 기록은 있으나 책은 현재 남아있지 않고 「齊民要術」「四時簒要」「王楨農書」 등 중국의 옛농서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읽히고 출판도 되었으리라 추측할 수 있으나 전래되지 않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농사직설」의 가치는 높이 평가된다.
책의 내용을 보면 備穀ㆍ地耕ㆍ種麻ㆍ種稻ㆍ種黍粟ㆍ種稷ㆍ種豆ㆍ種麥ㆍ種胡麻ㆍ種蕎麥의 10항목으로 나뉘어져 종자와 토양 다루는 법을 설명하고 재배법을 서술하고 있다. 물론 오늘의 농업기술과는 비교할 수 없겠으나 우리 실정에 맞지 않는 중국의 농서에 의존하던 당시에 전국 농민들의 경험을 토대로 우리 실정에 맞게 기술한 한국농업의 교과서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또한 조선조 5백년의 문화ㆍ학문ㆍ산업의 기틀을 마련한 세종대왕의 큰 업적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3. 農家集成

농가집성은 1655년 공주목사 신속(申속)에 의해서 편찬된 官版 종합농업기술서이다.
이 책은 세종의 「勸農敎文」 朱子의 「勸農文」「農事直說」「衿陽雜錄」「四時簒要抄」를 합본, 편집한 것인데 원본을 그대로 합본하지 않고 신속의 증보와 개수가 가해진 것이 특징. 후에 田以采ㆍ朴致維 重刊本에는 이외에도 「救荒撮要」「救荒補遺方」이 추가되었다.
조선시대 농업기술을 살피는데 있어서 농사직설과 쌍벽을 이루는 책이 금양잡록이다. 금양잡록은 姜希孟(1424~1483)의 경험과 견문을 적은 것으로 당시 농업수준과 저자의 탁월한 과학지식을 엿볼 수 있다. 농사직설이 경작법을 주로 설명한 것에 비해서 금양잡록은 품종별 특성이 강조되어있다.
다음에 「사시찬요초」는 唐宋의 한악의 저서 「사시찬요」를 기본으로 한국 실정에 맞게 편집한 것으로 편자가 확실치 않다.
「農集成」은 곡식작물재배 위주인 「農事直說」에 곡식품종 특성에 따른 적기와 적토를 논하고 기상 및 재해까지 유의한 「衿陽雜錄」, 그리고 곡식의 비중을 줄이고 원예작물인 채소류, 마류, 면, 염료, 약용작물, 축산, 양봉, 양잠, 식품가공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기술한 「四時簒要抄」가 합본된 百科農書라 할 수 있다.
「農集成」은 1655년 금속활자인 顯宗實錄으로 인쇄한 이후 1656년 전라도 관찰사 趙啓遠이 木板本으로 출판하고 1686년 田以采ㆍ朴致維本 등 지방의 여러 관아에서 출판되었다.
이 책의 편집자인 신속은 1600~1661년에 생존하였던 文臣으로 호는 二知堂 자는 浩中이다. 1644년에 文科에 급제하여 持平弼善을 지내고 승지 등 중앙 요직의 물망에 올랐으나 외숙인 김자점이 역모로 처형당하자 양주, 공주, 청주목사 등 외직으로 전전하였다.
신속은 그의 관직보다 농가집성의 편자로서 한국농학 및 출판사에 그 이름이 영원히 남을 것이다.

 

4. 養花小錄

「養花小錄」은 조선조 세조때의 문신 姜希顔(1419~1464)이 저술한 원예와 꽃에 관한 책으로 1473년에 그의 동생 姜希孟에 의하여 간행된 「晉山世稿」 1책 4권 중의 넷째 권에 수록되어있다.
「진산세고」는 姜氏三代의 文集으로 제1권은 姜淮白(1357~1402), 제2권은 姜碩德(1395~1459), 제3권과 4권에 姜希顔의 문집과 養花小錄이 포함되었다.
이 책은 養花妙方, 菁川養花錄, 청천양화소록 등의 異名으로 불려지고 있다.
姜希顔은 서문에서 「화초는 식물로서 감각도 없고 운동도 안한다. 건습과 한란을 잘 조절하지 못하여 그 본래의 성품에 어긋나게 하면 반드시 시들어 죽을 것이니 어찌 다시금 빼어나게 피어나서 그 참모습을 드러낼 수 있겠는가? 하찮은 식물을 기르는데도 이렇거든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사람에 있어서 그 마음과 형체를 괴롭게 하여 그 천성을 어길 수 있겠는가? 내 이제야 양생하는 법을 알았노라」라고 설파하였다.
이 말은 養花의 어려움을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 참뜻은 위정자가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어려운가를 말해준 것이다.
이 책을 기재된 花草花木은 老松, 萬年松, 烏班竹, 菊花(20), 梅花(8), 난초(10), 瑞香花, 蓮花, 石榴(5), 梔子, 四季花, 月桂, 山茶花, 百日紅, 일본철쭉, 귤, 石菖蒲 등 16종류에 이른다. 이들 花卉의 재배법에 이어서 怪石 盆內花樹法, 催花法, 花盆排置法의 설명이 첨부되어 있다.
이 책을 저술하면서 인용, 참고한 문헌으로는 神農書, 爾雅, 齊民要術, 格物論, 居家必用, 本草竹譜, 月菴種竹法, 菊譜, 菊花譜, 接花法, 梅譜分蘭法, 事林廣記, 格物叢話, 花卉名品雜俎圖經, 南方草木記 등 여러 중국책들이 있으나 단순한 인용이 아니라 실제 재배를 통한 경험을 시교하여 시비를 가린 한국화훼원예학의 최초의 저술이라 할 수 있다.

 

5. 攷事撮要

事撮要」는 中宗朝의 학자 也足堂 魚叔權이 1514년에 펴낸 百科便覽으로 한국인이 저술한 한국 최초의 百科事典이다. 어숙권은 서문에서 「撰者未詳의 曆年記와 要集을 근거로 하여 그 위에 과거의 사실을 널리 고찰하여 事大交隣을 위주로 하고 일상생활에 빼놓을 수 없는 사항들을 모아서 편성하였으며 영의정 沈連源, 우의정 尹漑, 참판 沈通源, 도헌 尹春年이 인정하고 대제학 鄭士龍이 事撮要라 명명하였다」고 쓰고 있다.
내용을 보면 進貢方物數目, 馬色, 生藥價, 熟藥價, 雜方, 養馬法 등 당시의 농산가공품의 내용을 알 수 있거나 각종 과일과 어류 조수류를 먹을 때 금기하여야 할 점, 각종 술을 빚는 방법과 수의학에 관한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1771년에 保晩齋 徐命膺이 고사촬요를 대폭 수정, 첨삭하여 「
事新書」로 改題 발행하였는데 중국의 사실을 너무 과중하게 취급하고 우리나라의 사실은 경시하였으며 당시의 상황과 맞지 않은 점이 많아서 이를 시정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농업과 관계된 내용으로는 天道門, 農圃門(上ㆍ下), 牧養門, 醫藥門 등이 있다.
고사촬요의 초판본은 上ㆍ下 1책의 乙亥金屬活字로 간행되었으며 許봉이 上中下 2책으로 戊午甲寅活字로 인쇄하였고 1612년에는 朴希賢이 上下 2책의 훈련도감 木活字로 속찬하였다. 1636년에는 崔鳴吉이 上中下 附錄 3책으로 戊申甲寅活字로 증감, 수정, 발간하였고 1771년에 保晩齋 徐命膺에 의해서 대폭 수정, 보완되어 7책 15권의 「
事新書」로 간행되었다.
고사촬요의 저자 어숙권은 吏文과 中國語에 능한 학자로 吏文學官에 올랐으며 한때 율곡 李珥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고사신서를 저술한 서명응(1716~1787)은 이조판서 徐宗玉의 아들로 농학을 가문으로 삼은 집안이다.

 

6. 新刊救荒撮要

「新刊救荒撮要」는 세종대왕인 지은 「救荒벽穀方」에서 중요한 것을 골라 1554년 (明宗 9年)에 한글로 번역하여 펴낸 「救荒撮要」와 「農歌集成」의 편저자인 申?의 저술인 「救荒補遺方」을 합본하여 1660년에 간행된 목판 언해본이다.
이 책에는 1660년에 宋時烈이 쓴 新刊救荒撮要序가 있고 1554년(嘉靖33年)에 石副承旨 李澤次의 刊行辭가 있으며 申속의 跋文이 있다.
「救荒撮要」는 해마다 호남과 영남에 기근이 심했기 때문에 使者를 보내어 賑恤救濟하는 것만으로 부족하여 구황의 긴요한 것을 골라 일기 쉽게 한글로 엮어 반포하였다. 이 책이 나온 뒤로는 觀察使가 만나는 사람마다 이에 대한 것을 질문하여 모르는 사람이 있으면 色吏와 勸農官을 論罪하고 모르는 사람이 많을 때는 留鄕所를 論罪하고 守令의 人事考課에도 반영하였을 뿐 아니라 鄕會에서 講論을 게을리 하지 않도록 하라는 임금의 분부도 있었다고 한다.
이 책은 기아에 지쳐 영양실조로 중태에 빠진 사람들의 구급법에서부터 대용식품의 조제법, 그 외에 필요한 조미료와 중화자의 소생에 필요한 비상용 술을 담그는 법도 기술하였다. 그러므로 조선시대 초ㆍ중기의 식량정책의 일환을 살피는 좋은 자료가 되며 구황에 필요한 자료를 살피는데 참고가 된다. 또한 비상식량 조리법과 그 당시의 식품가공법을 추측할 수 있는 식품사의 자료이며 국어어휘의 변모를 연구할 수 있는 국어사의 자료이기도 하다.
하편격인 「救荒補遺方」에는 雜物食法, 벽殺絶食, 方ㆍ不畏寒法, 造淸醫法, 謫仙燒酒方 등의 내용으로 구황촬요보다 한층 더 개발된 조리법과 다양한 재료를 열거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일제 말이나 해방직후에 이르기까지 식량난으로 굶어죽는 일이 흔히 있었다. 그러나 60년대 이후 경제발전에 힘입어 보릿고개를 극복하였는데 북한동포들은 아직도 식량난에 허덕이고 있다니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7. 鄕藥集成方

鄕藥集成方은 세종의 명에 의하여 大司成 權採, 侖好通, 盧重禮, 朴允德 등이 고려 및 조선초기의 의서와 唐ㆍ宋ㆍ元ㆍ明 등 중국의 의서를 합치고 醫官 등의 경험을 考正한 鄕藥學을 取捨按配하여 1433년에 集成한 조선조의 중요한 醫書이다.
中國에서 생산되는 약재를 사다가 쓰는 것보다 우리나라에서 나는 약재를 가지고 우리나라 사람들의 질병을 치료해야겠다는 세종대왕의 醫藥濟民의 뜻이 강한 책으로서 중국의학 의존으로부터 탈피하여 조선의학을 독립시킨 획기적인 사업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1488년에 부분적으로 諺解本이 간행되었고 1633년에 85권 30책으로 訓練都監字 小字本으로 중간되었다.
이 책의 내용은 病症 9백59종, 藥方文 1만7백6종, 鍼灸法 1천4백16종, 鄕藥本草 ?製法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모든 병을 57大綱門으로 나누어 그 아래에 9백59조의 小目으로 분류하고 각 강문과 조목에 해당되는 病論과 方藥을 출전과 함께 論擧하였다. 그밖에 책머리에는 資生經으로부터 채록된 鍼灸目錄, 책 끝에는 鄕藥本草의 총론과 각론을 붙였다.
이 책은 三和鄕藥方 鄕藥簡易方 鄕藥濟生集 濟衆立?方 御醫撮要方 鄕藥救急方 鄕藥古方 鄕藥惠民經驗方 東人經驗方 本朝經驗方 등의 朝鮮의 고유의서와 聖惠方 聖濟總錄 千金方 經驗良方 直旨方 袖珍方 古今經驗方 御藥院方 食醫心鑑 廣利方 醫林方 百要方 廣濟方 등 수백종의 중국의서를 인용하여 편찬한 醫學生의 교과서로 편찬, 사용하였으나 東醫寶鑑 醫學正傳 萬病回春 醫學入門 등의 新醫書가 出刊됨에 따라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1633년 訓練都監小字로 발간된 重刊本에는 임진ㆍ정유 양란 후에 난후부흥의 일단으로 鄕藥사용을 권장하기 위해서 刊行한다는 崔鳴吉의 跋文이 있다.

 

8. 磻溪隧錄

磻溪 柳馨遠(1622~1673)의 저술로서 경상감사 李미가 英祖의 명을 받들어 1733년 26권 13책으로 발간하였는데 후에 경상감사 趙時俊이 補遺1책을 속간하였다.
유형원은 實事求是의 학풍이 시작되는 萌芽期에 실학을 학문의 위치에 올려놓은 실학파의 신구자로 자신의 농촌생활에서 겪은 경험을 토대로 불합리한 사회제도의 개혁과 경제적 혁신을 역사적 문헌에서 고증하여 실증적 태도로 방법론을 제시, 유교적인 윤리와 정치의 시정을 사회개혁의 전제로 하고 이를 경제적 관계에 결부시켜 국가의 전 체계를 근본적으로 수정하고자 하였다. 특히 토지는 천하의 근본이라는 중농사상을 기반으로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조세ㆍ역ㆍ공ㆍ과학ㆍ교육ㆍ관료ㆍ군사 등 전반적인 국정을 혁신하고 중앙집권을 강화하여 자영농민을 육성함으로써 부국강병을 실현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經世致用의 사상은 李珥의 영향을 받았고 李瀷ㆍ洪大容ㆍ丁若鏞에 이르러 집약, 발전되었으나 그의 사상은 근대국가의 이념에까지 이르지 못하고 이를 받아들일 시민사회도 성숙하지 못하여 학문에 그치고 말았지만 전근대를 극복하고 근대와의 교량적 역할을 한점에 큰 의의가 있다.
이 책은 토지제도를 논한 田制, 교육과 고시제도를 논한 교선제, 관리의 임면제도를 논한 임관제, 관직제도를 논한 직제, 봉급제도를 논한 녹제, 군사제도를 논한 병제의 6부문과 지방행정을 논한 郡縣制(補遺)로 구성되어 있다.
농정과 관계가 있는 田制는 田制(上,下), 田制後錄(上,下), 田制攷說(上,下), 田制後錄攷說(上,下)로 구성되어 1~9권에 포함되어 있다.
저자는 전후 6차에 걸쳐 전국순회를 통해서 농민의 궁상과 낡은 제도의 결함을 보고 이를 匡救是正하기 위해서 이 책을 편찬했다고 한다. 생존시에 위정자들의 주의를 끌지 못하고 사후에 출간되었으나 조선시대 사회ㆍ경제 특히 田制 및 제도사연구에 귀중한 자료다.

 

9. 芝峰類說

芝峰 李수光(1563~1628)이 1614년에 편집ㆍ저술한 일종의 백과사전이다.
저자가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奏請使로 명나라를 왕래하면서 중국의 학문과 문화뿐 아니라 중국에 들어온 서양의 새로운 문물을 소개함으로써 실학의 선구자가 되었는데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실학의 총서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이 책에는 이탈리아 신부 마테오리치의 天主實義가 소개되어 천주교 연구에도 도움이 되는 귀중한 자료이다.
국내외의 많은 문헌을 참고하여 20권 10책으로 간행되었는데 3백48家의 서적에서 3천4백55의 사항을 抄記하여 25부 1백82항목으로 분류했다.
내용을 소개하면 卷一에 天文部ㆍ時令部ㆍ災異部, 卷二에 地理部ㆍ諸國部, 卷三에 君道部ㆍ兵政部, 卷四에 官職部, 卷五~七에 儒道部ㆍ經書部ㆍ文字部, 卷八~十四에 文章部, 卷十五에 性行部ㆍ身形部, 卷十六에 言語部, 卷十七에 人事部ㆍ雜事部, 卷十八에 技藝部ㆍ外道部, 卷十九에 宮室部ㆍ服用部ㆍ食物部, 卷二十에 卉木部ㆍ禽蟲部로 구성되어 있다.
농업과 관련된 19권의 食物部와 20권의 卉木部ㆍ禽蟲部의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食物部에는 일용식물에서 특이한 맛을 가졌거나 의학에 있어서 효험을 갖는 음식물에 대해 기록한 食餌, 술의 종류와 고사, 술 빚는 법을 적고 술과 곡식의 종류와 異名이 있는 곡식명을 적고 있는 穀食, 그 외에도 菜ㆍ果ㆍ藥으로 구분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卉木部에는 꽃의 종류와 번식지 등을 적은 花, 대의 종류와 대나무 심는 법을 적은 竹, 여러 가지 나무의 종류와 특산지, 그 열매의 용도를 자세히 쓴 木으로 구성되어 있다.
「좋은 재목이 되는 나무는 좋은 꽃을 피우지 못하고 또 좋은 꽃이 피는 나무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못하며 아름다운 열매가 열리는 나무는 좋은 재목이 되지 못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끝으로 禽蟲部에는 鳥ㆍ獸ㆍ鱗介ㆍ충치 등이 포함되어 있다.

 

10. 山林經濟

山林經濟는 숙종조 실학자 洪萬選(1643~1715)이 농사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일상생활에 알아 두어야 할 것을 기술한 책으로 종합적인 농서일 뿐 아니라 자연과학의 博物志라고 말할 수 있다.
저자 홍만선은 1666년에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掌樂院正에 이르렀으나 행실이 근엄하고 당쟁에 가담치 않아 당시의 사람들로부터 완인이라 일컬어 졌다. 특히 반계 유형원과 동시대의 인물로 주자학에 반기를 들고 實用厚生의 학풍을 일으켜 실학발전의 선구적 인물이 되었다.
四卷 四冊 十六志로 된 이 책의 내용을 보면 第一志 卜居에서는 주택ㆍ房室ㆍ廚房ㆍ門路ㆍ창고ㆍ담과 울타리 등 터의 선정과 기초공사 및 건축의 제반사를 노하였다. 第二志 攝生에서는 병을 물리치고 수명을 연장하기 위하여 심신을 다루는 법을 설명하였다. 第三志 治農에서는 驗歲ㆍ祈穀ㆍ擇種ㆍ收糞ㆍ耕播의 일반논과 제반작물의 경작법을 설명하였다.
第四志 治圃에서는 각종 원예작물의 재배법과 화초류ㆍ담배ㆍ약초류의 경종법을 설명하였다. 第五志 種樹에서는 과목과 임목의 재배를 논하였으며, 第六志 養花에서는 각종 화목과 화초 및 정원수의 배양법을 설명하였다. 第七志는 養蠶, 第八志는 牧養으로 소ㆍ말ㆍ돼지ㆍ양계ㆍ양봉ㆍ양어ㆍ養鹿 등을 논하였다. 第九志 治膳은 식품가공과 저장법, 第十志 救急에서는 각종 사고의 처치법과 1백 50여 가지의 구급법이 개진되어 있다. 第十一志 救荒은 흉년에 飢寒을 면하게 하는 방법, 第十二志 벽瘟은 전염병을 물리치는 내용으로 귀신을 쫓는 미신법이 소개되어 있다. 第十三志 벽蟲法에서는 뱀ㆍ모기ㆍ이 등 해충을 몰리치는 방법을 기술하였고, 第十四志 治藥편에서는 각종 약제와 제약법을 설명하였다. 第十五志에서는 選擇이라 하여 각종 吉凶日과 方所를 가려내는 내용을 담았고, 第十六志 雜方에서는 書畵를 다루는 법을 비롯하여 흔히 다루는 愛藏物을 손질하고 다루는 법을 설명하였다.
이 책은 후에 柳重臨에 의하여 增補山林經濟로 다시 나오고 徐有?의 林園經濟志ㆍ攷事新書ㆍ婦女必知ㆍ閨閤叢書 등에 큰 영향을 미치거나 이부가 전재되었다.

 

11. 增補山林經濟

e="3">增補山林經濟는 太醫內院 內醫 柳重臨이 洪萬選의 山林經濟를 증보ㆍ첨삭하여 1766년(영조 42년)에 완성하였다.
유중림은 산림경제를 증보하는 과정에서 홍만선이 취택하지 않은 「農歌集成」의 여러 자료를 포함하여 우리 고유의 농서와 농법을 참고하였으며 또한 중국 농서의 참고ㆍ인용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농서를 인용하는데 있어서 일정한 원칙이 있었다.
그것은 산림경제에 있어서 홍만선이 취한 태도와 같은 것이었다. 그는 중국의 농서를 분별없이 따온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농업에 적합하거나 또는 우리 농업의 실태를 설명하는데 적합한 경우에만 이를 인용하였다.
유중림은 산림경제를 증보하면서 세가지면에 유의하였다. 첫째는 水利施設과 農地擴張ㆍ施肥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농업생산을 증진시키기 위한 방법을 제시하려는 것이었고, 둘째는 농민 수입을 늘리기 위해서 시장과 관련된 농업경영을 중요시하고 있다.
특히 水田農業보다 수익성이 높은 旱田農業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水田農業을 부정하지 않은 채 旱田農業에 있어서의 수익성의 유리함을 강조하는 以田爲務였다. 세 번째는 요령있는 月令書를 작성하는 일이었다. 농가에는 할일이 많으나 農時를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며 그렇게 할 때 농민들은 손해를 보지 않고 이익이 많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런데 산림경제에는 농가월령을 수록하고 있지 않아서 계획성 있는 농업경영을 하기에는 불편한 바가 적지 않았다. 그러므로 農家所務를월령식으로 정리하여 농민들에게 참고하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며 그것을 增補四時纂要에 기술하였다.
이 책은 산림경제를 계승, 발전시킨 민족농학서로서 농업기술사ㆍ농정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인쇄되지 않고 필사본으로 전해오는 이 책은 全16卷 8冊ㆍ10冊ㆍ11冊ㆍ12冊 등 여러 가지 異本이 있다.

 

12. 農家月令歌

농가월령가는 일년 12달 농가에서 할일과 풍속을 월별로 나누어 읊은 가사인데 작가가 光海君시절의 高尙顔(1553~1623)이라는 설과 憲宗때 丁茶山(1762~1836)의 둘째아들 丁學游가 지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으나 확실치 않다.
농업기술을 보급하거나 적기영농을 권장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농서가 편찬되었으나 대부분 한문으로 쓰여져 있어 농민들이 활용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은 농민들 사이에 널리 퍼져 대대로 구전된 농가들로 달마다 해야 할 농사일과 계절에 따라 실시되는 풍속, 그리고 그때마다 지켜야 할 범절 따위를 한글로 써서 노래하였기 때문에 농촌에서 애창된 노래집이라고 할 수 있다.
농가는 李栗谷의 田園四時歌, 鄭澈의 勸民歌, 高尙顔의 농가월령, 金형洙의 月餘農歌, 李基遠의 農家月令, 尹禹煥의 농부가 등이 있는데 농가월령가는 이들 월령식 농가 중에서 대표적인 5백18句를 모아 놓았다.
중요한 내용을 보면 아래와 같다.

▲1월(立春ㆍ雨水)=농기구 다루기, 농우보 살피기 등 정초행사.
▲2월(驚蟄ㆍ春分)=봄갈이, 담배모종, 과목과 뽕나무 옮겨심기.
▲3월(淸明ㆍ穀雨)=한식, 가래질, 못자리준비, 치포, 과목접붙이기, 장담그기, 산나물 채취등.
▲4월(立夏ㆍ小滿)=목화ㆍ누에ㆍ수수, 풀 베어 거름만들기, 몸길쌈, 꿀벌의 산란 등.
▲5월(芒種ㆍ夏至)=도리깨질, 이모작 모심기, 단오, 모찌기, 모심기, 들깨 모종.
▲6월(小暑ㆍ大暑)=보리ㆍ밀ㆍ귀리 베기, 논ㆍ밭김매기, 멍석 만들기, 장 만들기.
▲7월(立秋ㆍ處暑)=꼴베어들이기, 허수아비 세우기, 밭에 거름주기, 김장 무ㆍ배추갈이.
▲8월(白露ㆍ秋分)=백곡ㆍ성숙ㆍ명주염색, 박 따기, 참깨거두기 등.
▲9월(寒露ㆍ霜降)=벼ㆍ조ㆍ팥ㆍ콩 거두기, 기름짜기.
▲10월(立冬ㆍ小雪)=
▲11월(大雪ㆍ冬至)=책력반포, 가마니짜기 등.
▲12월(小寒ㆍ大寒)=무명ㆍ명주 염색, 곶감ㆍ대추 등.

 

13. 農書輯要

농서집요는 「農桑輯要」의 내용 중에서 중한 대목을 발췌하고 한국 농사에 알맞게 수정, 증보하여 이를 吏讀 으로 번역한 책이다.
「農桑輯要」는 元世祖 忍必烈이 司農司에게 명하여 1273년에 완성한 7권3책의 중국농서로서 농림ㆍ수산에 관한 종합기술서이다.
이 책은 고려시대 杏村 李암(1284~1351)이 중국으로부터 가져와 국내에서 복각 출판되어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한국과 일본의 농업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이 책은 세종조에 편찬된 「農事直說」의 학적체계의 근간이 되었으며 朴世堂의 「穡俓」의 주자료가 되었다. 농상집요는 임진왜란 전까지 합권에 그대로 보존되고 있었으나 그 刊本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이 책의 주요목차를 보면 1면 新刊農書輯要序, 20면 收穀種 곡식종자 간수하기, 24면 小麥 보리 밀, 27면 水稻, 35면 大小豆菉豆 콩과 녹두, 37면 蕎麥 木麥 메밀, 38면 胡麻 참깨, 39면 麻 삼, 41면 「附記」로 되어있다.
「농서집요」는 「농상집요」의 농업기술을 번역한 것이 아니라 우리 농업에 필요한 부분만을 발췌하거나 그 적용이 가능하도록 발췌ㆍ번역하였으므로 중국농법을 선별적으로 수용한 셈이다. 농서집요의 편찬원칙으로 미루어 보래 우리는 조선조 초기의 농업정책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農書輯要」의 편찬자는 중국과 조선의 풍토가 같지 않음을 의식하고 중국농서를 발췌ㆍ번역하면서도 중국의 농법과 農時를 그대로 옮기는 것은 되도록 피하였다. 편찬자는 발췌를 조선농업에 무난하고 적합한 것으로 그리고 번역을 조선에서 관행하는 농법과 기술로서 행하였다. 그러나 「농서집요」는 한계가 있는 책으로 우리에게 꼭 알맞은 농업기술을 수록한 충실한 농서를 갈망하게 되었고 그 결과가 「農事直說」의 편찬으로 발전하였다.

 


14. 燕巖集

연암집은 正祖때의 實學者 朴趾源(1737~1805)의 詩文集. 1900년 金澤榮에 의하여 6권2책으로 일부분을 인행하였고 1932년 朴榮喆이 著者의 아들 朴宗侃 등이 57권18책으로 筆寫해 둔 책을 저본으로 하여 17권6책으로 발행하였다.
卷 1~10에는 序ㆍ論ㆍ碑銘ㆍ跋文ㆍ祭文ㆍ尺牘ㆍ雜著 등의 내용이 실려 있고 卷 11~15에는 熱河日記가, 卷 16~17에는 「課農小抄」가 수록되어 있다.
우리들에게 널리 알려진 「열하일기」는 연암이 1780년 朴明源의 수행원으로 청나라 건륭제의 七旬宴을 축하하기 위하여 중국에 들어가서 盛京ㆍ熱河 등지를 돌아보고 문인ㆍ명사들과 교류하면서 그곳 문물제도를 듣고 본대로 기록한 燕行日記다. 역사ㆍ지리ㆍ풍속에서부터 정치ㆍ경제ㆍ문학ㆍ예술에 이르기까지 수록되지 않은 것이 없고 특히 利用厚生的인 면에 중점을 두어 실증적 北學論을 주장하였으며 뛰어난 문장력으로 수많은 연행문학 중에 白眉的인 위치를 차지하게 한 거작이다.
「課農小抄」는 연암이 1798년 正祖의 綸音에 應旨하여 進疏한 綜合農書이다. 중년 이후에 시작된 연암의 農學연구는 연행사절의 수행원으로 중국을 다녀온 이후에 크게 영향을 받았으며 그가 중심적인 자료로 택한 우리 농서는 「農歌集成」과 「增補山林經濟」이고 中國農書는 徐有啓의 「農政全書」이다. 「농가집성」이나 「증보산림경제」는 우리 농업의 주류를 이루는 농서이고 「농정전서」는 당시 中國농학의 결정판.
고대로부터 내려온 중국농학을 총정리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연암은 우리읮 js통적인 농학의 기반위에 중국 최신의 농서, 최신의 농법을 통하여 중국의 농학을 이해하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 농학의 결함을 보충하려는 뜻으로 이 책을 저술하였다. 특히 水利問題ㆍ田畝制度ㆍ農具問題 등 農業技術을 중심으로 한 農地經營과 土地所有를 중심으로 한 經濟制度의 양면에서 問題를 제기하였다. 연암의 학문적 접근은 非朱子學的인 儒學者로서의 思想形態를 표현하는 것으로 地主的 입장의 農學思想이 아니라 農民的 小農的 입장의 농학사상을 공개적으로 정면 제기한 革新的인 시도로서 우리농학사상 하나의 새로운 지표적인 農書이다.

 

15. 杏浦志

杏浦志는 徐유구(1764~1845)가 농업기술과 농지경영을 중점적으로 다뤄 저술한 농업기술서이다.
저자 서유구는 대제학을 지낸 徐命膺(1716~1787)의 손자요, 경기관찰사를 지낸 徐瀅洙(1749~1824)의 아들로 金華耕讀記ㆍ種藷譜ㆍ經界策ㆍ蘭湖漁牧志ㆍ樓板考ㆍ林園經濟十六志 등 저서를 남겼다. 이조판서 등을 역임한 그의 生父인 徐浩修(1736~1799)는 「海東農書」를 편찬하여 3대에 걸친 농학자 가문으로 더욱 유명하다.
이 책은 후에 16부문 1백13권의 거작인 「林園經濟十六志」의 本利志와 灌畦志에 거의 전부 수록되었다.
서유구는 서문에서 『고금을 통하여 하루라도 없어서는 안되는 것은 곡물이고 고금이나 귀천지우를 막론하고 하루라도 돌보지 않으면 안 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농사일 것이다. 이 책은 일반농사 전반에 걸쳐 하나씩 모은 것으로 徐陵侯가 杏林과 舊蒲를 보면서 권농한 고사를 따라 행포지라고 이름을 붙였다. 經世오 같은 학문도 배웠으나 초야에 묻힌 선비가 시국을 말해서 무엇 할 것인가? 다만 氾勝의 상술과 농경술에 관하여 연구하면서 오늘의 실정에 알맞고 실천 가능한 것을 모아 여기에 기록했다. 이 책은 초야에 묻혀 땀 흘려 거둔 열매를 먹고 사는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권세를 잡고 있는 관리들을 위한 것도 되는 것이니 관리들이여 비웃지 말라』고 쓰여 있다.
이 책의 내용을 보면 토지면적의 측정단위와 척도법 등 結負에 관한 것과 諸田 및 量田法을 풀이한 田制, 하천 저수지 정수의 관개법을 논한 水利ㆍ벼ㆍ조ㆍ보리ㆍ콩 등의 작물의 종자선택이나 저장을 다룬 擇種, 수확과 갈무리를 다룬 功治ㆍ종식, 채소와 과일 및 특용작물ㆍ화훼ㆍ약용식물 등의 재배기술, 곡식의 종류와 품종별 명칭과 특성을 다룬 穀名攷, 수해ㆍ한해ㆍ풍해ㆍ霧海ㆍ霜害ㆍ충해를 다룬 五害攷로 되어있다. 이 책은 필사본으로 大阪부림도서관과 일소 吳漢根 소장본이 남아있으나 吳漢根本은 5~6권의 穀名攷ㆍ五害攷 영본 1冊만이 전해오고 있다. 필자가 일소문고를 인수하면서 이 책도 華峰文庫에 소장되었다.

 

16. 農政新編

농정신편은 신사유람단 朝士 趙秉稷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다녀온 安宗洙가 서양의 최신 농법을 정리하여 1885년에 新式鉛活字로 찍은 四卷四冊의 農書.
그러나 여러 가지 새로운 농법을 우리 실정에 맞도록 수정하여 기술하지 않고 단순히 서양의 근대 농법을 소개한 것이 특징이다.
이 책은 元山學校에서 사용한 최초의 근대식 한국의 교과서로 유명하며 1905년 단권으로 재판되었다.
侍講院文學 申箕善은 서문에서 『국가의 八政 중에서 먹는 것이 으뜸이고 백성의 네 가지 業 중에서 농사가 두 번째인바 농사는 天下之大本이라는 것과 泰西의 농법이 절묘하게 발달되어 한발을 예방하고 토지는 沃瘠의 구분 없이 같은 수확을 올리며 인간의 智巧를 최대한 발휘하여 그 발전상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발전되어 있는데 때마침 中西의 농서를 가져와 번잡한 것을 줄이고 한문으로 번역하여 이 책을 편술하는 것은 참으로 장한 일이다. 또 일부에서 이 농법은 서양의 기독교에서 나온 농법이라 사교가 침범될 우려가 있다하나 이는 道와 器를 모르는 탓이니, 「도」는 만고에 바꿀 수 없으나 「기」는 시대변천에 따라 바꿀 수 있는 것이며 오랑캐의 법이라도 모방하여 이용후생에 적용해야한다』는 요지로 되어 있다.
이 책의 내용은 권1에 土性辨ㆍ培養法, 권2는 糞저法ㆍ糞培法, 권3ㆍ4는 六部耕種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흙을 6종으로 구분하여 그 성질을 설명하고 경작방법ㆍ각종 비료의 제조법과 성능, 각종 작물의 뿌리ㆍ줄기ㆍ껍질ㆍ잎꽃ㆍ열매들의 상태와 재배법을 설명하는 나용으로서 근대과학을 토대로 한 식물학 혹은 농예화학적 견지에서 저술된 우리나라 최초의 농업기술서다.
편자 安宗洙는 조선조 말기의 문신으로 1886년 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의 主事로 있다가 1886년 갑신정변에 참여하여 실패한 수 개화당으로 몰려 서산군 馬島에 유배되었으며 1894년 갑오경장 때 석방되어 개혁파로서 지방관에 재직 중 단발령을 계기로 봉기한 지방민에게 희생되었다.

 

17. 農政撮要

「농정촬요」는 농상공부 대신이 되어 친일개화운동에 힘쓴 鄭秉夏(?~1896)가 1886년에 저술한 종합농서로서 종래 우리 실학파에 의한 전통농학을 계승 발전시키지 않고 서구 농법을 도입한 일본의 농법을 재도입한 것으로 당시 개화파의 농업관을 살피는데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특히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 국한문을 혼용하여 저술한 최초의 저서로서 한글문체연구에 귀중한 자료이기도하다.
저자는 서문에서 『六洲萬國이 均勢후에 自强에 이를 것이니 부국은 세 가지를 갖추어야하는바 지리와 인공ㆍ자본의 3요소가 그것이다. 우리나라는 농업개발이 급선무인바 지리는 天時寒暖이 적당하나 인공과 자본이 결하여 있다. 이제 농학을 분발하여 밝히고 인공과 자본을 더한다면 공은 반만 들여도 이로움은 배가 될 것이다. 여기에 중국과 서양의 여러 농설을 좇아 농정에 만에 하나라도 도움이 되고자 이 책을 엮는다』고 쓰고 있다.
상ㆍ중ㆍ하 3권1책 34장으로 된 이 책은 내용을 보면 권1에는 농업의 大意ㆍ연중행사 사항ㆍ耕耘시기 및 방법ㆍ비료효과ㆍ통풍의 중요성에 대하여 총론식으로 설명하였고, 권2에는 토지의 질과 이용법에 관한 것이고, 권3은 각론으로 벼ㆍ보리ㆍ콩ㆍ감자ㆍ조ㆍ기장 등의 종류 및 구별법 그리고 재배법에 대해서 설명하였다. 특히 주목할 것은 재래식의 농사법을 지양하고 작물의 특성에 맞추어 재배함으로써 수확을 늘릴 것을 강조했다.
이 책은 당시 개화파의 중요과제였던 농업진흥책의 하나로 엮어진 것이며 농촌경제를 안정시킴으로써 농민의 불만을 해소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국강병의 근대국가를 세울 수 있다고 믿어 당시 식자층이 상업을 통한 자강책을 강구하자는 주장에 대하여 반론을 펴고 있다.
통상으로 치부하고 있는 서구열강조차도 농정을 先務로 삼지 않은 나라가 없고 농정의 발전된 기초위에 상업을 발전시켜야 된다고 강하게 주장을 펴고 있다. 저자는 이 책을 저술하고 농상공부대신 감투를 썼으나 친일파로 몰려 1896년 아관파천으로 친러파내각이 등장하자 역적으로 몰려 도피 중 광화문에서 김홍집과 함께 난민에게 피살당했다.

이글은 光州日報 1994.4.19-8.9일 사이에 
17회에 걸쳐 연재된 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