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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적 문화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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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7-04-01     조회 : 1,081  


. 전적 문화재란 (사진은 본역사관 전시실)

전적이란 넓은 의미로는 "문자나 기호 등에 의해 전달되는 모든 기록정보"를 의미하며, 좁은 의미로는 "기록정보 가운데 각 학문분야에 있어 학술적 혹은 예술적 가치가 있는 기록자료"를 의미한다.

전적의 출발은 문자와 재료, 필기구의 등장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문자의 등장과 함께 통치자들의 언행과 통치자료를 기록하는 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므로 전적 문화재란 우리 선조들이 역사를 통해 남긴 기록자료들 중에서 역사적, 예술적 가치가 있는 것을 통칭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 이래로 이러한 전적들이 많이 남아있으며 역사적 가치를 지닌 이러한 전적 문화재를 구분하자면 전적(典籍), 고문서(古文書), 서적(書籍)으로 나눌 수 있다.




2. 전적(典籍)

전적의 범위는 매우 넓어 원래 종이와 문자로 된 모든 기록을 말하는 것이지만 좁은 의미의 전적은 책을 의미하는 것으로 서적을 대신하여 쓰는 품위있게 만든 과거의 귀중한 서적을 의미하는 것이다.

책으로 분류할 수 있는 전족의 종류에는 사본(寫本)과 인쇄본(印刷本)이 있다.

사본은 학자에 따라 여러 가지로 분류되지만 일반적으로 고본(稿本), 전사본(傳寫本), 사경(寫經) 등으로 나누며, 인쇄본은 다시 목판본(木版本)과 활자본(活字本)으로 나눌 수 있다.

사본(寫本)은 직접 붓으로 써서 엮은 책을 말하는 것으로 인쇄술이 등장하기 이전 인류는 필사(筆寫)를 통해 정보를 전달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저자나 편자가 처음으로 쓴 책을 고본(稿本) 혹은 원고본(原稿本)이라고하여 편찬자의 필적이 그대로 남았고, 내용 또한 일차자搔?정리한 것이므로 문헌 또는 사료로서 일차적 가치를 지니고 있어 예로부터 가치있는 자료로 전승하여 왔다.

고본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은 중종대 학자인 권벌(1478~1548)이 쓴 《충재일기(沖齋日記)》가 있는데, 이는 유희춘(柳希春:1513~1577)의 《미암일기(眉巖日記)》와 함께 임진왜란 시 소실된 선조 25년 이전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를 복원할 수 있는 중종 조의 귀중한 사료로 인용되고 있다.

사경(寫經)은 단순히 학습이나 연구를 위한 필사와는 달리 신앙적 차원에서 전법(傳法), 교화(敎化)를 목적으로 불경을 옮겨 쓰거나 베껴 쓴 것을 말하는데 이를 통해 천도(遷度), 공덕(功德), 권선(勸善)을 위한 신앙차원의 행위가 이루어졌다. 주로 백지나 감지(紺紙), 상지(橡紙)에 금이나 은가루를 가지고 썼다.
우리나라 초기 사경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신라 경덕왕 13년(754, 천보(天寶) 13년)에 착수해 이듬해 완성된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新羅白紙墨書大方廣佛華嚴經)》잔존 2축이 있다.

사본은 필사과정에서 오탈자 등이 많이 생겨 본문의 내용을 변화시키는 폐단이 있었으며, 서적에 대한 수요 증가로 인쇄술이 등장하였으며 이 중 목판으로 찍어낸 책을 목판본이라한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판본은 경주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으로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간행하여 탑에 봉안하였다. 한편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경판은 해인사 판고에 소장된 《고려사찰판(高麗寺刹板)》 중 화엄경판으로 해인사 승 성헌(成軒)이 고려 숙종 3년(1098)년 개판(開板)한 것이며 이후 고려시대 많은 경판이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목판인쇄술은 비용과 시간이 무척 많이 들었을 뿐만 아니라 책판으로는 오직 1가지 종류의 서적밖에 인출할 수 없으므로 목판인쇄의 불편함을 극복하기 위해 한 벌의 활자를 만들어 필요에 의해 식자(植字), 조판하여 손쉽게 책을 찍어내는 것을 활자인쇄라한다.

활자에는 금속활자, 목활자, 도활자(陶活字)등이 있으나 이중에서 가장 폭넓게 사용된 것은 금속활자이다.

금속활자본으로 세계 최고(最古)로 알려진 것은 고려 우왕 3년(1377)년 간행된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이며, 이후 조선시대 들어서는 활자인쇄가 크게 발달하여 국가에서 주자소를 설치하여 필요한 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3. 고문서

고문서는 특정한 주체가 어떠한 용건을 달성하기 위해 특정 대상에게 전달한 글과 그림이 담긴 것을 통칭하는 것이다.

고문서는 관점에 따라 공문서, 준공문서, 사문서, 외교문서 등으로 구분한다.

고문서는 특정한 주체가 어떠한 용건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특정의 대상에게 전달한 글과 그림이 담긴 것을 총칭하는 것으로 그 관점에 따라 여러 가지로 분류되지만 국왕과 관부(官府)의 공문서(公文書), 왕실 등의 준공문서(準公文書), 개인, 사찰, 서원, 결사 등이 발행한 사문서(私文書), 국가 간의 외교문서(外交文書)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고문서들은 예로부터 사료로서의 일차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으므로 사서(史書), 실록(實錄), 관서일기(官署日記) 및 문집(文集) 등의 자료에 폭넓게 인용되어 전해지고 있다.

현존하는 고문서는 왕으로부터 하사받은 공문서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데, 종류로는 교지(敎旨), 왕이 내리는 명령, 훈육 선포의 글을 담은 교서(敎書), 관찰사, 절도사 등이 임지로 부임할 때 징병할 수 있는 밀부(密符)를 내리는 명령서인 유서(諭書), 승정원을 통해 발급된 왕의 명령서인 유지(有旨), 공신도감을 통해 공신들에게 사급한 증서인 녹권(祿券), 녹패(祿牌) 등이 있다.

호적은 양반의 경우 3년에 한번씩 변경사항을 이 부 작성하여 관서에 올려 착오여부를 확인 받아 한 부는 개인이 보관하고 다른 한 부는 관서에 두었는데 이 경우 개인이 호구사항을 적어 관서에 올리기 위해 작성한 것이 호구단자라하고 관서가 등사해 준 호적등본을 준호구라 한다.

호구에 관한 문서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일본 정창원(正倉院)에서 발견된 신라장적이며, 국보로 지정된 조선 태조의 호적은 고려 공민왕 2년(1390) 호주 이성계의 명의로 본향인 영흥(永興)에서 성책(成冊)한 것으로 여말 양반의 호주장적의 체제와 성적(成籍) 과정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사문서 가운데는 노비상속을 다룬 자료로 고려 공민왕 3년(1354) 윤광전(尹光琠)이 그의 적장자인 윤단학(尹丹鶴)에게 노비를 상속한 노비 증서가 있으며, 조선 명종 20년(1565) 남양전씨 가문의 전화(田華)가 봉사(奉祀)를 위해 장자에게 전답 및 노비를 상속한 《분금문기(分衿文記)》가 전해지고 있다.

현존하는 사찰문서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송광사에서 소장하고 있는 《고려고종제서(高麗高宗制書)》로 이는 고려 고종 3년(1216)국왕이 조계산 제 2세 진각국사(眞覺國師) 혜감(惠堪)에게 대선사의 호를 하사할 것을 제가한 것이 있으며, 서원문서(書院文書)로 분류되는 서원자료가 전해지고 있어 사회경제사 연구에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다.




4. 서적

서적(書籍)은 전적과 고문서를 제외한 예술과 사상을 필자가 직접 글자로 표현한 유적을 말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서화(書畵), 시문(詩文), 서간(書簡)이 포함되어 있다.

고려시대까지의 서적은 거의 금석유물로 전해지고 있는데, 삼국시대 대표적인 자료로는 중국 집안현에 있는 광개토대왕비문이 있으며 신라의 글씨로는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의 글씨가 전해지고 있다.

고려시대의 것으로는 탄연(坦然)이 쓴 《문수원비문(文殊院碑文)》이 대표적인 탁본으로 전해지다가 한국전쟁으로 인해 유실되었다

조선시대 서적으로 안평대군 이용(安平大君 李瑢)이 쓴 《소원화개첩(小苑花開帖)》글씨가 대표적이다. 안평대군은 송설체(松雪體)를 가장 잘 구사한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시문(詩文), 서화(書畵)에 모두 능했다고 전한다. 일본 천리(天理)대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의 발문과 이 작품만이 안평대군의 진작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조선 중종 때 문신인 신공제 선생이 우리나라 역대 명필글씨가 새겨있는 돌을 탁본하여 책으로 묶은 《해동명적(海東名蹟)》이 있는데, 비록 탁본이기는 하나 비문에 전하지 않은 필적을 수집했으며, 고대 서법을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내용출처 : 인터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