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연합뉴스) 박종국 기자 = 남부러울 것 없던 청년실업가에서 부도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재기한 뒤 난데없이 박물관을 차리겠다고 나선 이가 있다.
김수명(45.충북 음성군 감곡면 오궁리)씨. 그의 인생 유전은 이렇다.
부유한 부모 밑에서 고생 모르고 살다 35살의 나이에 충북 음성에서 겁없이 아스콘 공장을 세웠다.
3년만에 연간 30억원대의 매출을 올리며 청년 기업가로 성장했고 그 덕에 지역 JC회장을 맡는 등 감투 복도 따르면서 무엇하나 부러울 것이 없었다. 인생은 늘 무지개빛으로만 그려지는 줄 알았다.
그러던 그도 1998년 불어닥친 외환위기 앞에서는 바람앞의 등불마냥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비교적 견실하게 회사를 운영했다고 자부했지만 보증을 서준 업체가 넘어가는 데는 도리가 없었다.
연쇄 부도로 부모님의 재산까지 탕진하면서 `지역 유지'였던 그는 순식간에 `온 집안을 말아 먹은' 땡전 한 푼 없는 빈털터리로 전락했다.
무일푼이 된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받아 들이기 어려웠고 다시는 옛날처럼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패배감에 산에 들어가 절 밥을 먹으며 고통스런 나날을 보냈다.
설상가상 공금횡령 혐의로 기소돼 10개월의 수감생활을 하고 나온 그에게 `희망'은 `사치'를 의미하는 단어였다.
그래도 그냥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산사에서 만났던 스님이 "공양보시로 먹고 살 생각해라. 비싼 것 팔 생각 말고 서민들 먹는 것 만들거라"고 일러준 말이 떠올랐다.
충주 앙성에 `외할머니집'이라는 토속 음식점을 차렸다. 어머니가 직접 만드는 구수한 손맛 덕에 청국장이며 순두부가 인기를 끈 데다 인근 골프장에 손님이 몰리면서 월 3천만원 어치를 팔 만큼 기대 이상의 대박을 터뜨렸다.
부도가 나면서 날렸던 부모님 집도 다시 찾아 드리고 형제들도 모두 재기하면서 불쑥 속 깊이 감춰두었던 지적 욕구가 스멀거리며 치밀어 올랐다.
어린시절 10여년간 서예를 하면서 매력을 느꼈던 서첩이며 고서에 관심을 돌리게 됐고 그 길로 골동품 장사에 나섰다.
2년여간 전국 안 다녀 본 곳 없이 발품을 팔며 고서며 골동품을 사 모으고, 팔다 보니 어느 순간 물건에 정이 가고 애착이 생기면서 팔기가 아까워졌다.
거둬들이는 물건은 늘고 나가는 물건은 줄다보니 30여평 남짓하게 축사를 개축해 `음성 기록역사관'이라고 명명한 건물을 빼곡히 채울 만큼 귀중한 고서와 서첩, 유물들이 자리를 잡았다.
최남선의 잡지 `소년' 제 1년 제 1권, 1800년대 휴대용 전국 군사지도, 일제시대 자동차에 부과된 세금고지서, 육영수 여사의 오빠 육인수씨의 선거공보, 조선시대 마지막 과거 급제자들의 명단인 `사마방목', 조선시대 마지막 법전인 대전회통...
내 건 간판이 `기록 역사관'이고 김씨의 취향대로 고서와 서첩이 주를 이루지만 여느 박물관에서 접하기 힘든 별나고 정감가는 옛 생활품들도 꽤 있다.
현수막도 내걸고 역사관을 소개하는 팸플릿도 배포하면서 이름이 알려져 주말에는 100여명이 넘는 이들이 찾을 만큼 지역 명물로 자리 잡았지만 김씨는 `박물관'으로 등록하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쉽다.
돈벌이를 위한 것이 아닌 데도 박물관 등록을 하려면 못줘도 매달 150만원은 줘야 하는 학예사를 의무적으로 고용해야 한다.
"팔기 아까워 모았고, 귀중한 자료들을 혼자 즐기기 아까워 함께 공유하고 싶은 생각 뿐입니다. 부담없이 와서 구경했으면 좋겠습니다"
후손들에게 물려 줄 문화유산에 대한 당국의 관심이나 지원이 너무 소홀하다고 생각하는 김씨는 외관만 키우는 지역 향토사학관의 내실을 채워야 한다는 주장도 잊지 않았다.
"수억원씩 들여 외관만 키울 것이 아닙니다. 2천만원씩 10년만 유물 구입에 써 보십시오. 지역의 훌륭한 박물관이 될 겁니다. 공문서도 함부로 폐기 처분해서는 안돼요. 10년, 100년이 지나면 그게 다 역사가 되고 유물이 되는 겁니다"
3천개가 넘는 일본에 비해 우리나라에는 270개의 박물관 밖에 없다며 안타까워하는 그는 "음성기록역사관도 머지않아 멋진 박물관으로 탈바꿈시킬 것"이라고 목에 힘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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